원화 스테이블코인③ 은행·빅테크·블록체인, 삼자 구도의 패권 경쟁

원화 스테이블코인 시장은 전통 금융의 신뢰를 무기로 한 은행권, 막강한 사용자 플랫폼을 앞세운 빅테크, 그리고 혁신적인 기술력과 글로벌 전략을 내세운 블록체인 전문기업 등 세 그룹의 플레이어들이 각기 다른 전략으로 치열하게 각축을 벌이는 양상이다.
전통 금융의 강자들은 기존의 규제 준수 경험과 높은 신뢰도를 바탕으로 시장 주도권을 지키려는 수성 전략을 구사하고 있다. 이들은 특히 투명한 준비금 확보와 리스크가 상대적으로 낮은 기관 간 지급결제 시장을 우선적인 타겟으로 삼고 있다.
가장 가시적인 성과를 내는 선두주자는 BDACS-우리은행 컨소시엄의 KRW1이다. 2025년 9월 아발란체 블록체인에서 성공적으로 PoC를 완료한 KRW1은 규제 준수형 모델을 핵심 전략으로 내세운다. 사용자가 예치한 원화 전액을 우리은행의 특정 신탁 계정에 1대1로 보관하며, API를 통해 준비금 현황을 실시간으로 검증할 수 있도록 설계해 투명성과 안정성을 극대화했다. 이는 향후 제정될 법규를 선제적으로 충족하는 모범 사례를 제시하며 시장의 표준이 되겠다는 의도로 해석된다.
한편 KB국민, 신한, 하나, 우리 등 6대 시중은행과 금융결제원은 공동 스테이블코인 발행을 위한 컨소시엄 구성을 논의 중이다. 이들은 JP모건의 JPM Coin처럼 개인 소매 시장보다는 리스크가 낮고 수요가 명확한 기관 간 지급결제 시장을 우선 타겟으로 삼을 가능성이 크다. 은행 공동의 브랜드를 통해 신뢰도를 높이고, 개별 은행이 단독으로 개발에 나서는 부담을 줄이려는 협력 전략이다.
네이버, 카카오, 토스 등 빅테크 기업들은 이미 확보한 방대한 사용자 기반과 강력한 플랫폼 파워를 무기로 신흥 시장을 장악하려는 공성 전략을 펼치고 있다.
시장이 가장 주목하는 공룡 연합은 네이버파이낸셜과 두나무 연합이다. 네이버페이가 보유한 1,500만 명 이상의 충성도 높은 사용자 기반과 간편결제 인프라, 여기에 국내 1위 가상자산 거래소 업비트를 운영하는 두나무의 블록체인 기술력과 유동성이 결합될 경우 그 파급력은 상당할 수밖에 없다. 양사는 단순 협력을 넘어 조인트벤처 설립까지 검토 중이며, 네이버의 쇼핑·콘텐츠 서비스와 연계된 페이먼트 루프(충전-결제-정산)를 구축해 단기간 내 시장을 장악할 잠재력을 갖췄다.
카카오 역시 카카오뱅크라는 강력한 금융 플랫폼과 블록체인 프로젝트 카이아(Kaia)를 양축으로 시장 진출을 준비하고 있다. 이미 다수의 원화 스테이블코인 관련 상표권을 출원했으며, 카카오톡을 기반으로 한 송금·결제 서비스와의 결합을 통해 강력한 네트워크 효과를 창출할 것으로 예상된다.
후발주자이지만 시장 판도를 흔들 다크호스로는 토스가 꼽힌다. 토스는 자체 TF를 구성해 사업 타당성을 적극적으로 검토 중이며, 2위 거래소인 빗썸과의 결제 시스템 협력 논의도 진행된 바 있어 잠재력이 크다는 평가다.
전통 금융이나 빅테크와는 다른 출발선에 있는 블록체인 네이티브 기업들은 차별화된 기술력과 글로벌 네트워크를 앞세워 틈새를 공략하는 기습 전략을 구사한다. 이들은 국내 규제를 피해 해외에서 먼저 시장을 개척하는 방식을 택하고 있다.
가장 대표적인 사례는 IQ & Frax의 KRWQ다. 블록체인 AI 기업 IQ와 글로벌 스테이블코인 인프라 기업 프랙스(Frax)는 협력을 통해 2025년 10월, 멀티체인 기술인 레이어제로(LayerZero)를 기반으로 KRWQ를 출시했다. 이들은 한국 규제를 피해 해외에서 발행하고, KYC를 거친 기관 투자자와 글로벌 디파이(DeFi) 시장을 대상으로 원화 유동성을 공급하는 전략을 선택했다. 이는 국내 기업과 규제 당국에 시장 선점의 중요성을 환기시키는 메시지로도 해석된다.
금융보안 전문기업 이니텍과 콘텐츠 플랫폼 팬시(fanC)가 손잡고 만든 KRWIN은 K-콘텐츠 결제, 외국인 관광객 대상 간편결제 등 특정 버티컬 시장을 집중 공략하는 전략을 취한다. 필리핀 등 규제가 상대적으로 유연한 동남아 시장에서 실사용 사례를 먼저 검증한 뒤, 국내 법제화 시점에 맞춰 본격적으로 진출하겠다는 단계적 접근법이다.
게임사에서 블록체인 기업으로 변신한 위메이드는 자체 메인넷 스테이블원(StableOne)을 구축했다. 자사의 방대한 게임과 NFT 생태계 내에서 사용될 특화 스테이블코인을 발행해, 외부 경쟁과 무관한 독자적인 경제권을 구축하려는 전략이다.
원화 스테이블코인 경쟁은 누가 발행하느냐의 문제를 넘어, 어떤 기술이 미래 디지털 금융의 표준이 될 것인가를 둘러싼 기술 패권 경쟁이기도 하다. 특히 상호운용성, 투명성, 규제 준수 기술이 핵심 경쟁 요소로 부상하고 있다.
스테이블코인이 성공하기 위해서는 특정 블록체인(이더리움, 솔라나, 아발란체 등)에 갇히지 않고 다양한 네트워크를 자유롭게 넘나들 수 있어야 한다. 이 상호운용성을 구현하는 기술력 확보 여부가 향후 스테이블코인 시장의 주도권을 가를 중요한 분기점이 될 것으로 보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