원화 스테이블코인, 한국이 더 이상 미룰 수 없는 이유

2025년 말 글로벌 금융 시장의 지형을 흔들 큰 파도가 밀려오고 있다. 그 중심에는 스테이블코인이 있다. 법정화폐와 가치를 1 대 1로 연동하는 이 디지털 화폐는 단순한 기술 실험을 넘어 국가 간 결제, 기업 금융, 개인의 일상까지 바꿀 잠재력을 품고 있다. 전 세계 스테이블코인 시가총액은 2025년 10월 기준 3,079억 달러로 사상 최고치를 경신했고, 일부에서는 2028년 2조 달러에 이를 것이라는 전망까지 제기된다.
이 흐름 속에서 미국은 2025년 7월 지니어스법(GENIUS Act)을 제정하며 규제 명확성을 확보했고, 유럽연합(MiCA), 일본, 홍콩, 싱가포르 등 주요 금융 허브들은 이미 제도화를 완료한 채 디지털 금융 패권 경쟁에 본격적으로 뛰어들었다. 그러나 IT와 금융을 모두 강점으로 내세우는 한국은 유독 느리게 움직여 왔다. 중앙은행 디지털화폐(CBDC) 도입을 검토하다 스테이블코인으로 방향을 바꿨지만, 부처 간 이견과 정치적 논쟁 속에서 중요한 골든타임을 허무하게 흘려보내고 있다는 비판이 커지고 있다.
한국에 더 이상 머뭇거릴 시간은 없다. 원화 스테이블코인은 단순한 암호화폐가 아니라, 달러 중심의 디지털 금융 질서 속에서 통화 주권을 지키고 노후화된 금융 인프라를 혁신하며 미래 성장 동력을 확보하기 위한 전략적 과제다. 원화 스테이블코인이 무엇인지, 한국이 왜 이를 원하면서도 동시에 주저하는지, 그리고 그 기회와 위험 요인을 짚어볼 필요가 있다.
스테이블코인은 이름 그대로 가치가 안정된 코인이다. 비트코인이나 이더리움처럼 가격 변동성이 큰 암호화폐와 달리, 달러 혹은 원화 같은 특정 법정화폐와 가치를 1 대 1로 고정한 디지털 자산이다. 예를 들어 1 원화 스테이블코인은 1 원의 가치를 유지하는 것을 목표로 한다.
그 안정성의 핵심은 담보다. 현재 논의되는 대부분의 스테이블코인은 법정화폐 담보형으로, 발행사가 발행량만큼의 실물 자산을 은행 등에 준비금으로 예치하는 방식이다. 사용자가 1,000개의 원화 스테이블코인을 원하면 발행사 계좌에 1,000원을 예치하고, 반대로 코인을 원화로 환급하면 코인은 소각되고 예치된 준비금에서 1,000원이 지급된다. 이 구조 덕분에 사용자는 언제든 액면가로 현금화할 수 있다는 신뢰를 갖게 된다.
과거에는 담보 없이 알고리즘으로 가치를 유지하려는 알고리즘 스테이블코인도 존재했지만, 2022년 180억 달러 규모의 테라·루나 붕괴 이후 사실상 시장에서 퇴출됐다. 이 사건 이후 글로벌 규제 당국과 시장은 100% 실물 담보형 모델만을 유효한 스테이블코인으로 인정하는 분위기가 확고해졌다.
스테이블코인은 블록체인 위에서 작동한다. 블록체인은 모두가 함께 기록을 쓰고 검증하는 디지털 공공장부에 비유할 수 있다. 중앙 관리자 없이 네트워크 참여자들이 거래 기록을 공유·검증하기 때문에 데이터 위변조가 사실상 불가능하다. 이 기술 덕분에 스테이블코인은 은행이나 카드사 같은 중개자 없이도 24시간 365일 전 세계 어디로든 저렴하고 빠르게 송금할 수 있는 특징을 갖는다.
스테이블코인은 종종 CBDC나 간편결제 서비스와 혼동되지만 본질적으로 다르다. CBDC는 중앙은행이 직접 발행하는 법정화폐의 디지털 버전이고, 스테이블코인은 민간이 발행하는 일종의 디지털 예금증서 또는 전자지급수단이다. 간편결제는 기존 금융망 위에서 인터페이스만 편해진 방식이라 여러 중개기관을 거치며 수수료와 정산 시간이 발생한다. 반면 스테이블코인은 블록체인 위에서 이용자 간 직접 정산이 이루어져 수수료는 낮아지고 정산은 거의 실시간이 된다. 이는 결제의 편의를 넘어 결제 시스템 구조 자체를 바꾸는 전환이다.
정부와 산업계가 규제 불확실성에도 원화 스테이블코인 도입을 서두르는 이유는 그 안에 거대한 기회가 담겨 있기 때문이다. 이는 금융 혁신을 넘어 국가 경제 체질을 바꾸는 전략 카드로 평가된다.
가장 시급한 이유는 디지털 통화 주권 수호다. 글로벌 스테이블코인 시장은 달러 연동 코인이 97% 이상을 점유하고, 국내 시장에서도 2025년 1분기에만 57조 원 규모의 달러 스테이블코인 거래가 발생했다. 이는 국내 투자자들이 원화가 아닌 디지털 달러를 사용해 자산을 거래·저장하고 있음을 의미한다. 이런 디지털 달러라이제이션이 심화되면 원화 사용 기반 축소, 통화정책 영향력 약화 등 문제로 이어질 수 있다. 이재명 정부가 원화 스테이블코인을 공약으로 내세운 이유도 여기에 있다.
현실적인 문제 해결도 있다. 현재 국내 투자자가 해외 거래소에서 암호화폐를 거래하려면 원화에서 비트코인으로 환전 후 다시 달러 스테이블코인으로 바꾸는 복잡한 과정을 거쳐야 하고, 이 과정에서 비용과 위험이 발생한다. 원화 스테이블코인이 도입되면 이러한 불필요한 마찰 비용이 사라진다. 2025년 4월 한 달 동안 약 8조 원 규모의 자본이 해외 거래소로 이동한 것으로 추정되는데, 원화 스테이블코인이 사용되더라도 그 담보 자산은 국내 은행에 보관된다. 코인은 해외에서 쓰여도 준비금은 국내 금융 시스템에 남기 때문에 자본 유출을 막고 국내 유동성을 유지하는 효과가 있다.
원화 스테이블코인의 잠재력은 가상자산 시장에만 국한되지 않는다. 결제 시스템 혁신과 비용 절감에서 실물 경제 전반으로 파급 효과가 확산된다. 예를 들어 국경 간 무역 결제에 스테이블코인을 활용하면 기존 SWIFT 대비 정산 시간이 단축되고 중개 수수료가 크게 낮아진다. 해외 팬덤 산업에서도 복잡한 환전 절차 없이 즉시 정산이 가능해지는 등 새로운 가치 사슬이 열릴 수 있다.
더 중요한 점은 원화 스테이블코인이 미래 디지털 금융 인프라의 핵심 레이어로 기능한다는 것이다. 토큰증권과 실물자산 토큰화는 자산을 블록체인 위에서 거래하는 기술인데, 이때 결제수단 역시 토큰화되어야 거래가 완결된다. 원화 스테이블코인은 바로 이 결제 레이어 역할을 하며 국내 디지털 금융 생태계의 경쟁력을 끌어올리는 기반이 된다.
그러나 장밋빛 전망에도 한국 정부와 금융당국이 신중한 태도를 보이는 이유는 스테이블코인이 양날의 검이기 때문이다. 특히 한국은행은 11월 발표한 보고서를 통해 7가지 핵심 리스크를 경고했다.
한국은 원화가 기축통화가 아니라는 근본적 한계를 가진다. 달러가 국제 무역과 외환보유고에서 압도적 비중을 차지하는 반면, 원화의 국제 점유율은 2%에도 못 미친다. 이는 두 가지 문제를 낳는다. 하나는 낮은 국제 수요로 인해 유동성 확보가 어렵다는 점이다. 유동성이 부족하면 작은 충격에도 디페깅 위험이 커진다.
또 다른 문제는 글로벌 거래에서 여전히 달러 스테이블코인이 표준화될 가능성이 높다는 현실이다. 이 경우 국내 사용자는 원화에서 원화 스테이블코인, 다시 달러 스테이블코인으로 환전해야 하는 비용을 감수해야 한다. 결국 원화 스테이블코인은 통화 주권 수호와 글로벌 통용성의 한계 사이에서 어려운 균형을 요구받는 셈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