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금보미의 아파트 다음의 집①] 아파트만 지어선 안 되는 시대가 온다

부동산 개발을 하다 보면 자연스럽게 땅을 먼저 보게 된다. 얼마에 살 수 있는지, 몇 평을 지을 수 있는지, 법정 용적률은 얼마나 나오는지, 공사비와 금융비용을 반영했을 때 엑셀 시트 위에 얼마의 마진이 남는지 살핀다. 나 역시 오랫동안 그런 방식으로 사업성을 검토해왔다. 그런데 여러 현장에서 주택을 개발하고 직접 소비자를 마주하면서 어느 순간부터 스스로에게 다른 질문을 던지기 시작했다.
“그런데 이 집에는 대체 누가 살지?”
단순한 질문처럼 보이지만, 필자는 앞으로의 주택 개발 시장에서 이 질문이 사업의 성패를 가르는 가장 결정적인 기준이 될 것이라고 확신한다. 대한민국에서 ‘집에 사는 사람’이 그 어느 때보다 빠르게 달라지고 있기 때문이다.
집값보다 먼저 변하고 있는 것
우리나라에서 부동산을 이야기하면 열에 아홉은 아파트 가격부터 꺼낸다. 강남 아파트가 얼마를 찍었는지, 서울 집값이 오를지 내릴지, 기준금리가 어떻게 움직일지에 모든 관심이 집중된다. 물론 중요한 거시 지표들이다. 하지만 개발자의 입장에서 조금 더 긴 호흡으로 시장을 바라보면 가격 지표보다 먼저 살펴봐야 할 근본적인 변화가 있다. 바로 ‘가구 구조의 다변화’다.
과거 대한민국의 대표적인 주거 모델은 비교적 명확했다. 결혼해 아이를 낳고, 가족 구성원이 늘어남에 따라 더 좋은 학군과 더 넓은 평수를 찾아 이동했다. 자연스럽게 주택 시장의 공급 공식도 3~4인 가족 중심의 아파트에 맞춰 발전했다.
하지만 지금 도시를 살아가는 사람들의 모습은 완전히 파편화돼 있다. 혼자 사는 전문직 직장인, 비혼을 선택한 사람들, 아이 없이 온전히 둘만의 삶을 즐기는 딩크족, 자녀가 독립한 뒤 다시 둘만 남은 시니어 부부까지 다양하다. 주거를 소비하는 주체의 모습은 빠르게 바뀌고 있는데, 과연 우리가 골목길과 도심에 공급하는 주택은 얼마나 달라졌을까? 나는 바로 이 불일치 지점에서 중소형 주택 시장의 새로운 기회가 열리고 있다고 본다.
34세 직장인의 집을 상상해보자. 서울 도심에서 일하는 34세 직장인 여성이 있다고 가정해보자.
그녀는 직주근접을 원한다. 집에서 보내는 절대적인 시간이 길지는 않지만, 그렇다고 퇴근 후의 일상을 아무렇게나 방치하고 싶지도 않다. 편안한 침실과 계절 옷을 넉넉히 수납할 공간이 필요하고, 주말에는 친한 친구 한두 명을 초대해 와인 한잔을 나눌 수 있는 다이닝 공간도 있었으면 한다. 늦은 밤 귀갓길의 안전은 필수이고, 건물의 디자인과 동네의 분위기 역시 자신의 취향과 결이 맞기를 바란다.
그런데 지금 서울에서 이 사람에게 주어지는 선택지는 생각보다 잔인할 정도로 좁다. 인프라가 갖춰진 신축 아파트는 진입 장벽이 너무 높고, 흔히 접하는 다세대·원룸은 보안과 주거의 질이 턱없이 부족하다. 오피스텔과 도시형생활주택 역시 규격화된 방 한 칸에 머무는 경우가 많아 공간적 만족도가 떨어지고 관리 품질의 편차도 크다.
여기에 중소형 주택 시장의 본질적인 블루오션이 있다. 이것은 단순히 ‘작은 집을 많이 짓는 시장’이 아니다. ‘작아진 가구의 라이프스타일에 맞춘 새로운 주거 상품을 정의하는 시장’이다. 둘은 완전히 다른 비즈니스다.
이제는 ‘토지 확보’보다 ‘상품 기획’의 시대다
과거에는 좋은 땅을 선점하는 능력 자체가 디벨로퍼의 가장 큰 경쟁력이었다. 땅만 사두면 수요가 알아서 채워지던 공급 부족의 시대였기 때문이다.
하지만 지금의 개발 환경은 혹독하다. 토지 가격은 여전히 높고, 공사비는 천정부지로 치솟았으며, 금융비용 부담은 사업의 숨통을 조이고 있다. 예전처럼 땅을 사서 최대 용적률을 뽑아내고 세대수를 욱여넣는 것만으로는 결코 수지표를 맞출 수 없다.
그래서 역설적으로 지금부터는 개발자의 ‘상품 기획력’이 프로젝트의 마진을 결정한다. 같은 30㎡(약 9평)라도 어떻게 기획하느냐에 따라 전혀 다른 가치를 창출할 수 있다.
현관문을 열었을 때 침대부터 보이는 30㎡와 생활 동선과 프라이버시가 완벽히 분리된 30㎡는 소비자가 체감하는 가치와 지불 의향이 완전히 다르다. 수납공간을 벽면 어디에 숨길 것인지, 채광창의 높이를 어떻게 설정할 것인지, 세탁과 건조 동선을 어떻게 해결할 것인지, 공용 공간의 분위기를 어떻게 연출할 것인지에 따라 주거 경험은 극명하게 갈린다. 중요한 것은 공급 면적의 숫자가 아니다. 제한된 면적 안에서 ‘어떤 밀도의 일상’을 가능하게 하느냐의 싸움이다.
주택도 결국 ‘고객 경험’을 축적하는 상품이다
주택 개발을 지속하며 나는 자연스럽게 호텔, 모빌리티, 식음료, 패션 산업을 유심히 들여다보게 됐다. 이들 산업의 공통점은 끊임없이 고객을 집요하게 연구한다는 것이다. 누가 소비하는지, 어디서 불편을 느끼는지, 어떤 디테일에 기꺼이 프리미엄을 지불하는지를 데이터로 분석해 다음 상품에 즉각 반영한다.
반면 지금까지의 주택 개발업은 어떠했는가. 한 프로젝트가 완판되고 투자금을 회수하면 다시 원점에서 새로운 땅을 찾고, 새로운 설계를 외주로 맡겨 낯선 건물을 짓는다. 앞선 현장에서 치열하게 부딪히며 얻은 이용자 데이터와 공간적 시행착오가 다음 프로젝트로 체계적으로 계승되지 못했다. 특히 중소형 주택 시장은 그 단절이 더욱 심했다.
필자는 중소형 주택 개발 역시 토지 중심의 단발성 사업에서 ‘고객 중심의 지속 가능한 비즈니스’로 진화해야 한다고 믿는다. 명확한 타깃 고객을 정의하고, 그들에게 최적화된 표준 평면을 개발하며, 자재와 설계를 규격화해 원가를 통제하고, 입주 후 관리와 운영 경험까지 하나의 ‘브랜드’로 일관되게 책임지는 모델이다.
‘짓고 파는 일회성 사업’에서 ‘반복 가능한 시스템’으로
개발사업의 가장 큰 리스크는 프로젝트마다 모든 조건, 즉 대지 조건과 인허가, 시공 환경 등이 완전히 초기화된다는 점이다. 그래서 열 번을 성공한 디벨로퍼도 단 한 번의 현장에서 무너질 수 있다.
이것이 중소형 주택 개발이 반드시 넘어서야 할 숙제다. 좋은 집을 어쩌다 한 번 잘 짓는 것보다 훨씬 중요한 것은 ‘검증된 품질의 주거 상품을 오차 없이 반복해서 생산하는 시스템’을 구축하는 일이다.
입주자의 피드백을 데이터로 쌓고, 공실 없이 높은 임대료를 방어할 수 있는 평면을 공식화하며, 시공 현장의 디테일을 매뉴얼로 만들어 원가 상승을 방어하는 구조가 필요하다. 이것이 갖춰질 때 비로소 개발업은 불확실한 도박이 아니라 경험과 데이터가 축적될수록 마진과 경쟁력이 높아지는 ‘고부가가치 제조업’의 영역으로 진입할 수 있다.
아파트 다음의 집을 향하여
물론 아파트의 시대가 끝난다는 뜻은 아니다. 대한민국에서 대단지 아파트가 가진 환금성과 주거 편의성은 여전히 독보적이다.
다만 모든 사람이 아파트라는 단 하나의 정답만을 원하는 시대는 확실히 저물고 있다. 가족의 형태가 달라졌고, 일하는 방식이 바뀌었으며, 사람들이 공간에 부여하는 가치관 역시 눈부시게 다양해졌기 때문이다.
그렇다면 집을 짓는 개발자 역시 달라져야 한다. 앞으로 본 연재를 통해 서울 골목길 중소형 주택 개발 현장에서 직접 부딪히며 경험한 이야기들을 솔직하게 풀어내고자 한다. 부지를 선별하는 안목부터 타깃 설정과 평면 기획, 공사비 폭등 속 원가 방어 전략, 브랜딩과 임대 운영 노하우까지 다룰 예정이다. 빛나는 성공의 기록뿐 아니라 현장에서 겪었던 쓰라린 오판과 값비싼 시행착오의 과정도 가감 없이 공유하려 한다.
개발의 시작은 엑셀 시트의 차가운 숫자일지 모르지만, 그 숫자를 완성하는 마지막 퍼즐은 언제나 ‘사람’이기 때문이다.
과거의 훌륭한 개발자가 ‘땅의 미래’를 내다보는 사람이었다면, 앞으로의 개발자는 그 위에 한 가지를 더 얹을 수 있어야 한다. 바로 ‘그 땅에서 살아갈 사람의 미래’다. 그 시선의 변화에서부터 아파트 다음의 주거에 대한 이야기를 시작해보고자 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