원화 스테이블코인② 51% 룰의 딜레마와 골든타임

"미국이 어떻게 안전한 스테이블코인을 만들 것인가에 대한 규칙을 확립하고 시장 참여자들에게 혁신의 운전대를 맡긴 반면, 한국은 여전히 누가 발행하고 감독할 것인가라는 열쇠의 주인을 정하는 문제에 발이 묶여 있다."
미국 정보기술혁신재단(ITIF)이 2025년 8월 보고서에서 던진 이 문장은 한국의 원화 스테이블코인 논의가 처한 현실을 뼈아프게 관통한다. 지루한 논쟁이 이어지는 사이 시장은 기다려주지 않는다. 이미 국내외 민간 기업들은 규제 공백을 틈타 해외 블록체인 네트워크에서 원화 기반 스테이블코인을 우회 발행하며 시장 선점에 나서고 있다. 현실은 제도보다 훨씬 앞서가고 있는 셈이다.
원화 스테이블코인 법제화의 가장 큰 걸림돌은 발행 자격을 둘러싼 은행과 비은행 진영의 대립이다. 이는 단순히 사업권 다툼을 넘어, 스테이블코인을 제2의 화폐로 볼 것인지, 아니면 혁신 금융상품으로 규정할 것인지에 대한 철학적 충돌이기도 하다.
한국은행은 일관되게 은행 중심 발행을 주장한다. 화폐의 생명인 신뢰는 국가의 엄격한 관리 체계 안에서만 보장될 수 있다는 논리다. 네이버나 카카오 같은 빅테크 기업의 발행을 허용하면 사실상 예금 수취와 지급결제를 수행하는 내로우 뱅킹(Narrow Banking) 라이선스를 주는 것과 다름없으며, 이는 금산분리 원칙 훼손과 자본 유출의 우회로가 될 수 있다고 한은은 경고한다.
반면 금융위원회와 여당 일각, 핀테크 업계는 비은행 개방을 통한 혁신을 강조한다. 보수적인 은행에만 발행권을 부여하면 글로벌 속도 경쟁에서 뒤처질 것이고, 이미 방대한 결제 인프라를 확보한 빅테크가 참여해야 생태계 확장이 가능하다는 현실론이다.
팽팽한 대립 속에서 최근 한국경제 등의 보도에 따르면 당정은 은행 중심 컨소시엄 모델로 가닥을 잡아가는 것으로 전해진다. 시중은행이 컨소시엄 지분의 51% 이상을 보유해 법적 책임과 안정성을 맡고, IT 기업이 기술 파트너로 참여하는 구조다. 안정성과 혁신성을 동시에 잡겠다는 정치적 타협의 성격이 짙다.
그러나 이른바 51% 룰은 즉각 새로운 법적 딜레마와 마주했다. 현행 은행법 제37조(금산분리 원칙)에 따르면 은행은 비금융회사의 의결권 있는 지분을 15% 이상 보유할 수 없다. 은행이 과반 지분을 가지려면 발행사를 아예 금융 자회사로 편입하거나, 특별법으로 예외를 인정해야 한다. 이는 특혜 시비뿐 아니라 또 다른 입법 전쟁을 예고하고 있다.
발행 주체 논쟁의 이면에는 더 복잡한 감독 권한 다툼이 자리 잡고 있다. 한국은행은 통화 주권 수호와 지급결제 시스템 안정성을 명분으로 발행량 관리와 준비자산 감독 등 핵심 통제 권한을 요구한다. 금융위원회는 소비자 보호와 금융상품 규제를 내세우며 인가부터 운영 전반까지 감독하겠다는 입장이다. 여기에 기획재정부까지 국경 간 거래에 따른 외환시장 교란 가능성을 우려하며 외국환거래법 체계 내 관리 필요성을 주장하고 있다.
각 부처가 서로의 권한을 둘러싸고 다투면서 입법은 교착 상태에 빠지고 있다. 과거 가상자산 감독권을 두고 금융위와 금감원이 엇박자를 냈던 ‘한 지붕 두 가족’ 사태가 재현될 수 있다는 우려도 나온다.
한국이 내부 논쟁으로 시간을 허비하는 동안 주요국들은 각자의 철학에 따라 규제 프레임워크를 완성해가고 있다. 미국은 "규제는 바닥이지 천장이 아니다"라는 기조 아래 2025년 지니어스법 등을 통해 은행뿐 아니라 연방·주 인가를 받은 비은행 기관에도 발행을 허용하는 이원적 규제를 도입했다. 엄격한 건전성 요건을 충족하면 혁신을 열어주는 실용주의 노선이다.
유럽연합(EU)은 MiCA를 통해 유로화 연동 코인을 장려하고 역외 통화 코인을 견제하며 통화 주권을 강화하는 방향으로 나아갔다. 일본과 싱가포르도 각각의 해법을 마련했다. 일본은 은행과 신탁사 등 기존 금융기관 중심의 안정 모델을 택했고, 싱가포르는 엄격한 기준을 통과한 발행사에 인증 마크를 부여하는 방식으로 절충했다.
이들 국가의 사례는 결국 한국에 중요한 질문을 던진다. 한국은 미국의 실용주의, 유럽의 주권 수호, 일본의 안정 우선 모델 중 어떤 길을 택할 것인가.
지금 가장 경계해야 할 위험은 아무것도 결정하지 않는 것이다. 비기축통화국이자 자본 통제 국가라는 특수성을 고려하되, 은행 지분 51%라는 기계적 수치에 매몰돼 혁신의 불씨까지 꺼트려서는 안 된다. 은행법 예외 적용에 대한 사회적 합의를 서두르거나, 미국처럼 건전성 규제를 전제로 진입 장벽을 낮추는 단계적 접근을 고민해야 한다. 원화 스테이블코인이 찻잔 속 태풍으로 끝나지 않으려면, 이제는 ‘누가’의 문제를 넘어 ‘어떻게’로 논의의 중심을 옮겨야 할 골든타임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