막힌 전력망, 건설 후 이전(BT) 방식이 해법이다

전력 동맥경화와 치명적인 공간 매스매치
한 국가의 전력망은 국가 에너지 안보의 근간이자 미래 첨단산업의 경쟁력을 좌우하는 핵심 인프라이다. 그러나 현재 우리나라의 전력 계통은 지리적 수급 불균형, 이른바 ‘공간 매스매치(Mismatch)’로 인해 심각한 전력 동맥경화 현상을 겪고 있다. 한반도 서남부 지역에는 태양광과 풍력 등 재생에너지 발전소가 집중돼 있는 반면, 이를 소비할 초대형 전력 수요처인 반도체 클러스터와 인공지능(AI) 데이터센터 등은 수도권에 밀집해 있기 때문이다.
송전망 부족으로 인해 지방에서 생산된 전기를 수도권으로 보내지 못하는 ‘출력제어(Curtailment)’ 현상은 단순한 에너지 낭비를 넘어선다. 이는 RE100 이행을 추진하는 기업들에게 구조적인 투자 차질을 초래하고, 글로벌 시장에서의 산업 경쟁력 약화로 이어질 수 있는 국가적 위험요인이다.
이를 해결하기 위해 서해안 초고압직류송전(HVDC) 조기 구축 등 장거리 송전망 확충이 시급하지만, 제9차 전력수급기본계획에 반영된 주요 사업 28건 중 40%인 11건이 이미 기한을 넘겨 지연되는 등 계통 접속 지체 현상이 가시화되고 있다.
공공 독점 모델의 한계와 물리적·재무적 제약
지금까지 우리나라 전력망 구축은 한국전력공사(한전)가 건설부터 소유, 운영까지 전 과정을 전담하는 공공 독점 체제로 진행돼 왔다. 그러나 과거의 한전 주도 모델은 변화된 에너지 환경과 재무적 현실 속에서 한계에 직면하고 있다.

가장 큰 문제는 재원 조달 능력의 한계이다. 한전의 누적 부채는 증가세를 이어가며 2025년 말 약 206조 원에 이르렀고, 사채 발행 한도마저 제한되면서 재원 조달 여력이 크게 줄어든 상태다. 2038년까지 국가 전력망 확충에 필요한 투자 재원은 약 72조8000억 원으로 추산되는데, 이를 한전 단독으로 조달하기에는 상당한 부담이 따른다.
또한 송변전 필요 물량은 과거 대비 1.7배 증가했지만, 한전 내부의 송변전 건설 인력과 조직 역량은 이를 충분히 수용하기 어려운 상황이다. 더불어 송전탑과 변전소 건설에 대한 지역 주민 반발, 지자체와의 협의 지연 등으로 평균 건설 기간이 10년 이상 소요되는 사례도 적지 않다.
공기업 특유의 경직된 의사결정 구조만으로는 이러한 문제를 해결하기 어려운 만큼, 전통적인 한전 중심 체계만으로 적기 송전망 구축을 달성하기는 물리적으로도, 재무적으로도 쉽지 않은 상황으로 보인다.
새로운 청사진, BT(건설 후 이전) 방식의 도입
국가적 과제인 전력망 확충을 적기에 달성하기 위해 정부와 국회가 검토하고 있는 대안이 바로 '건설 후 이전(BT, Build-Transfer)' 방식이다. BT 모델은 막대한 자본력과 기민한 사업 추진 능력을 가진 민간과, 보안 및 운영 통제가 필수적인 공공부문이 결합된 하이브리드형 인프라 확충 모델이다.

역량 있는 민간사업자가 금융권 자금을 활용해 설계, 환경영향평가, 민원 협의 및 시공을 거쳐 송전망을 책임 준공한다. 이후 완성된 송전망의 소유권과 운영권은 100% 한전에 이전되며, 한전은 민간이 투입한 공사비와 일정 수준의 자본비용을 10~15년에 걸쳐 장기 분할 지급 방식으로 정산하게 된다.
필요시 「국가기간 전력망 확충 특별법」에 따라 정부가 재정 지원을 통해 한전의 부담을 완화하는 방안도 검토할 수 있다.
우회적 민영화 논란의 원천 차단
일각에서는 민간자본의 전력망 투자 확대를 두고 ‘우회적 민영화’가 아니냐는 우려를 제기한다. 그러나 BT 방식은 민간투자법상 임대형 민자사업(BTL)과는 구조적으로 차이가 있으며, 민영화 논란을 차단하는 장치를 갖추고 있다.

표에서 보듯 BT 방식에서 민간은 ‘건설’ 단계까지만 책임을 지며, 완공 이후 국가 핵심 인프라인 송전망의 유지보수나 계통 운영에는 개입할 수 없다.
운영 및 제어 권한은 전적으로 한전에 귀속되기 때문에 모든 발전사에 차별 없이 전력망을 개방하는 계통 중립성과 공공성이 유지된다. 따라서 민영화 우려는 상당 부분 해소될 수 있다. 반면 BTL 방식을 적용할 경우에는 송전망 소유권이 정부에 귀속되고 시설사용료 역시 정부가 지급하는 구조이기 때문에 현행 민간투자법 체계상 여러 제도적 쟁점이 발생할 수 있다.
기존 제도의 진화와 재무적 선순환(Financial Synthesis)
현재도 전력망 연계가 시급한 일부 사업에 대해서는 발전사나 공장 신설 기업이 선투자를 하고, 한전이 준공 후 일시불로 전력망을 매입하는 제도가 운영되고 있다.
그러나 한전의 초기 자금 부담이 크고, 민간기업 입장에서도 자금 회수 불확실성이 존재해 활용에 한계가 있었다. 새롭게 진화된 BT 모델은 이러한 문제를 개선하고 재무적 선순환 구조를 창출한다.

가장 큰 변화는 한전의 매입대금 지급 방식을 일시불에서 10~15년 장기 분할 지급으로 전환하고, 사전 확정 정산 시스템을 도입하는 것이다.
지급 구조가 명확해지면 민간 사업자는 이를 기반으로 채권유동화(Securitization)를 추진할 수 있다. 이는 민간의 초기 자금 부담을 완화하는 동시에 금융시장에 존재하는 풍부한 유동성을 국가 핵심 인프라인 전력망 투자로 유인하는 금융적 연결고리 역할을 할 수 있다.
국가 생존을 위한 100년 인프라 완성과 정책 제언
전력 동맥경화를 해소하기 위한 BT 방식의 도입은 다음과 같은 네 가지 효과를 기대할 수 있다.
첫째, 재무 건전성(Financials) 측면에서 국민성장펀드와 지역 주민참여펀드 등 민간자금의 선제적 투입을 통해 한전의 재정 부담을 분산할 수 있다.
둘째, 실행속도(Agility) 측면에서 민간의 기민함과 유연한 협상력을 활용해 인허가와 민원 문제를 보다 효율적으로 해결하고 사업 기간을 단축할 수 있다.
셋째, 공공안보(Governance) 측면에서 완공 즉시 소유권과 운영권을 100% 한전에 귀속시켜 전력망의 중립성과 국가 에너지 안보를 유지할 수 있다.
넷째, 산업 경쟁력(Competitiveness) 측면에서 AI 산업단지와 반도체 클러스터에 적기 전력을 공급함으로써 기업의 RE100 수요를 충족하고 국가 산업 경쟁력 강화에 기여할 수 있다.
결론적으로 에너지 고속도로 사업은 단순한 송전망 확충을 넘어 자본의 효율적 배분을 통해 국가 미래 인프라를 구축하는 전략적 과제라고 할 수 있다.
이 모델이 성공적으로 안착하기 위해서는 정책 당국의 신속한 지원이 필요하다. 불필요한 분쟁 소지를 줄일 수 있는 ‘표준계약서 제정’, 금리 및 정산 불확실성을 최소화하는 ‘사전 확정 정산 시스템 구축’, 그리고 「전기사업법」 및 「국가기간 전력망 확충 특별법」 개정을 위한 국회의 신속한 입법이 요구된다.
공공의 책임성과 민간의 역동성이 결합된 BT 방식이 조속히 실행돼 우리나라 경제의 혈관 역할을 하는 에너지 고속도로가 차질 없이 구축되기를 기대한다.